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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으로 칼을 뽑았다. 가족을 등진 도망자가 되어서라도 지키려던 여인마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러나 적들에게 미처 가닿기 전부터 총알 세례를 받은 그는 온몸이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남자, 세상을 구하지 못한 주인공 <한성별곡-正> 박상규의 마지막이었다.
“답답하셨죠? 주인공이란 녀석이 칼 한번 못 뽑으니. 사실 검술 연습은 매일매일 했는데 겨우 두 명 베고 끝났네요.” 그러나 마지막 촬영을 마친 뒤 4개월간 길렀던 수염을 밀고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비극의 주인공은 슬퍼하기보다는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며 웃는다. 임금을 암살하려는 거대한 음모 속에서 배후로 추정되는 아버지를 고발하지도,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도 못해 괴로워하는 ‘사극판 햄릿’인 동시에 적을 때려눕히기는 커녕 얻어맞아 코피가 터지곤 하는 ‘꺼벙 도령’ 박상규의 복잡한 내면을 연기한 배우 진이한은 그보다 훨씬 재기발랄하다.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상처 받았어요”
사실 많은 시청자들에게 ‘진이한’이 낯선 이름이듯 그에게도 드라마가 낯설다.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다 군대에 다녀온 뒤 대학 졸업반 때 연기를 하고 싶어 무작정 연극과 수업을 듣고 대학로를 찾아간 그는 최근 몇 년간 뮤지컬 <루나틱>, <풋루즈>를 통해 스타로 떠올랐고 지난해에는 유지태 주연의 연극 <육분의 륙>에도 출연했지만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는 <한성별곡-正>이 처음이었다. “진실 된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내가 어떻게 하면 화면에 예쁘게 나올까 하는 고민은 버렸어요. 그런데 내가 실제로 너무 가슴 아프다고 느끼면서 연기 했던 장면을 편집할 때 보니 너무 우습게 나왔더라구요. 감정이 표정으로 전달이 안 된 거죠. 카메라 앞에서 처음으로 상처 받았어요.” 그러나 결국 자신이 처한 현실에 갈등하고 방황하는 박상규와 자신을 포위한 카메라들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야 하는 진이한의 흔들리는 눈빛은 캐릭터와 배우가 겹쳐지는 지점을 찾아내며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 오디션 때 “지금까지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 눈썹 진한 청년을 첫 미니시리즈 연출작의 주인공으로 과감히 기용한 곽정환 감독이 “너 자신이 상규야. 더 이상 뭘 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한 대로였다. “상규가 ‘무슨 소리냐!’라는 사극투가 아니라 ‘무슨 소리야?’라는 가벼운 말투를 쓰거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고, ‘허으윽!’하는 신음 대신에 ‘아으, 진짜 아프다...’ 라면서 엄살 부린 것들은 다 감독님과 상의했던 부분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처음 보면 ‘쟤 왜 저래?’라며 웃을 거란 걸 알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주인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모험의 첫 발을 내딛은 자의 눈빛
진지한 설명도 설명이지만 장면 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박상규로 돌아가는 말투와 표정이 다채로워 눈을 뗄 수 없게 하고, 카메라 앞에서도 끊임없이 노래를 흥얼대고 피루엣을 도는 모습은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감성이 훈련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춤, 노래, 그림, 운동에 두루두루 재능이 있는 그가 연기자로 우리 앞에 나타나 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예전에 미술을 좋아할 때는 지하철에서나 버스에서나 스케치북을 꺼내놓고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풍경을 무조건 그렸는데 지금은 연기에 또 그만큼 빠져들었어요. 그런데 연기는 죽을 때까지 배워도 모를 테니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모험의 첫발을 내딛은 것처럼, 진이한은 눈을 빛낸다. 이제 흔들림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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