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처럼 차가운 얼굴 뒤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 오승하 역의 주지훈
오승하는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탐낼법한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오승하라는 캐릭터는 주지훈이란 연기자를 만남으로써 그제야 비로소 생명을 부여 받은 진정한 유기체로 태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주지훈이 아닌 다른 이가 연기하는 오승하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니 말이다.
주지훈씨가 박찬홍 감독님과 술을 마시면서 <마왕>에 캐스팅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만…
사실은 제가 먼저 캐스팅 제의를 받은 게 아니라 우연히 <마왕>의 대본을 보게 되었는데 승하 역을 보고는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소속사 사장님과 상의해 제작사 측에 연락을 했어요. 그래서 박감독님을 만나게 되었죠. 감독님께서 절더러 ‘죽을 만큼 힘들 텐데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길래 ‘견딜 수 있다’고 답했고, 그 다음날 캐스팅이 됐다고 연락이 오고선 감독님과 술을 마신 거예요. 술 마실 땐 오히려 작품 얘기보다 그냥 이런저런 개인적인 얘기들을 많이 했구요.(웃음)
그렇게까지 승하 역을 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감정의 표현이 아주 진한 게 좋아요. 그게 사랑이든 분노든 간에 그 편이 연기하기도 수월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승하 역은 너무나 끌렸고 전체적인 극의 짜임새나 내용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처음 승하 역으로 캐스팅된 사실이 알려졌을 때 연기력 논란이 불거졌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오기 같은 것도 들었을 법 합니다만…
<마왕>이 저에게는 겨우 두 번째 작품이었으니까 오기란 게 생길 이유가 없었어요. 승하 역은 정말 어려운 역이었고 이제 두 번째 작품을 하는 사람에게 선뜻 맡기기도 힘든 역임에도 불구하고, 또 제가 해보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던 건데 그런 절 믿고 맡겨주신 감독님이 감사했죠. 제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당연한 거라 생각했고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이에요.
주지훈씨가 느낀 승하는 어떤 인물인가요? 승하에게 연민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눈이 나쁜 분들이라면 이 비유가 쉽게 이해되실 텐데 안경이나 렌즈를 끼지 않은 채 어두운 거리를 걷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어딘지 몽환적이긴 하나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닌 불쾌한 몽롱함, 분명 현실이란 걸 알고 있지만 또 현실이 아닌 듯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느낌… 설명이 좀 추상적이긴 하지만 저에겐 그런 느낌이었어요. 승하는 정태성과 오승하가 공존하는, 하나의 인간의 속에 둘의 인격을 지닌 감정이 뒤섞인 이중인격자예요. 오수를 보면 지금까지 느껴온 분노와 동시에 그에 대한 동정심까지 함께 느껴져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가’라는 죄의식과 그 반면에 죄의식을 억누를 만큼 더 큰 복수심이 혼재되어 있어요. 그런 승하가 참 불쌍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연기하는 제 기분이 우울해지기도 했죠. 승하도 불쌍한 인물이지만 오수 역시 불쌍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 솔직히 짜증나기도 했거든요.(웃음)
승하는 철저히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복수를 감행하는데, 이런 승하의 복수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는 시청자의 입장이 아닌 승하를 연기해야 하는 입장이라 복수에 대해서 크게 반발을 느끼진 않았어요. 어떤 분들은 승하의 잔인하고 철두철미한 복수극에 치를 떨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승하를 무조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연기라는 것에 배우의 감정이 들어가긴 하지만 작품을 만들고 전체적인 흐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감독님이 어레인지를 주시는 걸 듣고 이해하려고 하지, ‘나 같으면 이렇게 안 할 텐데’ 라는 생각은 안 해요. 왜냐면 제가 아닌 승하를 보여줘야 하는 거라서 그런 생각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승하의 복수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요. 권력이라는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형과 어머니를 잃고,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은 승하에게 복수는 ‘좋다, 나쁘다’의 개념을 뛰어넘은 당연한 일일 수 있으니까요.
극 중 승하와 실제 주지훈씨의 성격은 어떻게 다른가요?
제가 A형인데, 보통 A형이라고 하면 아주 소심하고 혼자 꽁한 스타일이라 생각하지만 A형도 굉장히 소심한 A형과 굉장히 개방적인 A형 두 부류가 있어요. 전 후자 쪽이라 불만이 있으면 바로 말을 해버리는 편이에요. 제가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고 그때그때의 기분을 다 표현해버리는 스타일인 반면 승하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분노를 안으로 축적해 계획적인 복수로 승화시키죠.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승하는 일인칭적인 표현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실제 저의모습과 많이 다르다 보니 승하에게 몰입하는 게 어렵기도 했죠. 만약 제가 승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방황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남은 인생을 포기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왕>은 추리물을 표방한 심리극으로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 비하면 전혀 새로운 장르였습니다만 연기하시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다르시던가요?
보통 드라마는 시작에서 끝을 향해 달리지만 <마왕>은 그 반대였어요. 모든 사건이 일어난 뒤 그 비밀이 드러나는,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나중에 보여주는 스타일이죠. 저 역시도 세부적인 부분은 모르는 상태에서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만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전체 대본이 다 나온 상태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서 마지막회까지 가지 않으면 완벽하게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승하의 행동과 감정을 연결시키기 위해선 스스로 앞을 내다보는 수 밖에 없었죠. 촬영이 진행되면서 ‘이런 걸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표현이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들었구요. <마왕>은 의미 없는, 혹은 시시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는 드라마예요. 촬영을 끝내고 나서 모든 대사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작가님이 정말로 존경스럽게 느껴졌죠.
<궁> 때는 촬영을 위해 사전에 여러 운동을 배우셨는데 <마왕>에 캐스팅 된 후 승하 역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또한 공백기 동안 어떤 식으로 연기 연습 등을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마왕>은 촬영 열흘 전에 캐스팅이 확정된 거라 뭔가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나마 다행히도 제가 미리 살을 빼놓았던 게 승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져서 준비 아닌 준비가 돼버렸죠.(웃음) 그런 걸 보면 어떤 운명처럼 다 자기가 할 몫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연기 연습은 <궁> 때 많은 지적이 있었던 부정확한 발음 교정을 위주로 계속 노력을 했고요. 연기 수업을 평소에 꾸준히 받는 건 아니지만 작품이 결정되고 나면 그때부터 수업을 받아요. 저 혼자만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면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알려주기도 하셔서 확실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승하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참고로 보신 영화나 기타 작품이 있나요?
처음 시놉시스 상에서는 승하가 여러 사람을 죽이면서 복수를 한다고만 돼있어서 그런 류의 영화와 만화들을 몇 편 보긴 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승하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시작한 게 아니라서 전형적인 복수극이나 연쇄살인범들이 등장하는 그런 작품들을 봤는데, 승하가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여린 마음과 연민을 가지고 많은 갈등을 하는 인물이라 결과적으로 연기에 도움이 된 건 별로 없었어요.(웃음)
감독님께서는 승하 캐릭터에 대해 어떤 식으로 연기하라고 요구하시던가요? 또 승하 캐릭터에 본인만의 설정이 가미된 게 있다면 어떤 부분입니까?
제가 <마왕> 시작할 때 <몬스터>란 만화책의 ‘요한’이란 주인공을 참고로 삼았었는데, 요한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시킨 악마 같은 인물인 반면, 승하는 스스로는 악마가 되고자 하지만 결국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라고 감독님께서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대부분의 큰 틀은 감독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연기했고 저는 승하의 걸음걸이나 자세 같은 걸 더욱 곧고 바르게 해서 빈틈이 없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머리를 짧게 자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구요.
극 중에서 승하는 대부분 검정색 위주의 모노톤 의상만을 입었는데요. 특별한 의도가 있나요?
감독님께서 승하의 어두운 마음을 겉으로도 드러내기 위해 어두운 색깔의 의상을 입으라고 주문하셨어요. 대신 승하가 혼자 집에서 있을 때는 흰색 등의 밝은 의상을 입고 있죠. 사소한 부분일 수 있지만 시청자들을 위한 감독님의 작은 배려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주블랙’이란 별명이 더 굳어진 것 같습니다만…(웃음)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웃음) 주블랙의 블랙이 원래는 ‘블랙홀’에서 따온 거예요. 블랙홀처럼 빨려 든다는 의미로 팬들이 지어주신 별명인데 제가 원래 까맣기도 해서 그런 의미로도 일맥상통하는 거 같구요.(웃음) 얼마 전에 팬클럽 창단식을 하면서 팬 여러분이 팬클럽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아니나다를까 ‘블랙홀’이더라고요.
김지우 작가님은 승하를 통해 청소년기의 상처가 인간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고 싶었다고 하셨습니다. 주지훈씨의 청소년기는 어땠나요? 혹시 남모를 상처가 있었나요?
청소년기에 받은 상처가 인간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저도 크게 공감하고 있어요. 저 역시도 어린 시절 받은 상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지금도 순간순간 떠올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 어떤 것인지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웃음) 저의 청소년기는 한창 반항적이던 또래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비교적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학교에서 그리 눈에 띄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활발하지만 그 외에는 얌전한 아이였고, 그 때도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해 책을 자주 읽었고 잠을 참 많이 잤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주지훈씨는 독서광으로도 유명하신데, 혹시 극 중 승하가 도서관에서 읽던 <거짓의 사람들>, <인격과 전이> 등을 실제로도 읽어보셨는지요?
촬영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고, 촬영 후에는 굳이 읽고 싶지 않았어요. <마왕>을 생각만 해도 슬픈데 그 책들을 읽음으로써 일부러 아픔을 일깨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수영장 씬, 샤워씬 등 노출씬이 좀 있었는데, 그럴 경우 따로 운동을 하시나요? 평소에 즐겨 하시는 운동이 있다면?
노출씬을 위해 따로 운동한 건 없었지만, <궁>이 끝난 후 살을 빼려고 운동을 했던 터라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두 번째로 몸이 좋았던 때였어요.(웃음) 여타 드라마에서 말 그대로 몸매가 노출되는 것이 목적인 씬이라면 몸에 맞는 조명을 줘서 좀더 몸이 좋아 보이게 만드는데, <마왕>은 드라마 특성상 승하의 노출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씬이잖아요. 나중에 TV로 보니까 실제 제 몸매보다 훨씬 더 형편없이 밋밋하게 나왔어요.(웃음) 나름대로 운동도 열심히 했고 실제 제 몸이 화면에 비친 것처럼 밋밋하지는 않았는데 좀 속상하더라고요. 저 평소에는 운동 완전 싫어해요!(웃음) <궁> 끝나고서 스트레스로 살이 많이 쪘길래 하는 수 없이 운동을 했던 건데 식이요법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10kg 정도 감량했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이 찌는 체질인가요?
체질적인 건 아니구요. 하루에 두 시간 겨우 자면서 촬영하는 생활이 8개월간 계속되다 보니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혼자 술을 마셨어요. 집에서 그 날 촬영한 거 생각하다 보면 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스트레스 받고, 그러다 보면 또 술 마시고 이게 반복되니 살이 찔 수밖에요.(웃음) <마왕> 때도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드라마 촬영 시스템에 이제는 적응이 됐고, <궁> 때 맨날 술 마시다가 살이 찐 경험이 있으니까 술로는 안 풀었죠.(웃음)
본인 스스로도 승하에게 온전히 몰입되었다고 생각됐을 때는 언제부터였나요
글쎄요. 그건 보시는 분들이 아시겠지 저 스스로는 모르겠는데요.(웃음) 제가 캐릭터에 완전하게 몰입됐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몰입이 안 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어떤 건방진(?) 연기자가 자기 스스로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런가요?(웃음) 촬영 감독님께서 주지훈씨는 슛 들어가면 캐릭터에 몰입하는 속도가 굉장히빠르다고 하시던데요.
그건 제 능력이 아니라 함께 연기한 선배님들 덕분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왕>에 출연하신 연기자 대부분이 정말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분들이세요. 기존 드라마로 이미 유명한 선배님들도 계셨지만 그 외에도 연극 무대에서 오랜 세월 실력을 쌓은 분들이 대부분이셨거든요. 저도 모르게 저절로 리액션이 나오게끔 선배님들이 연기를 너무 잘 해주셨어요. 제가 혼자 연습을 열심히 해서 열을 만들어 가면 현장에서 이분들과 직접 연기를 했을 때 열다섯 혹은 스물까지도 나오게끔 만들어주시니 정말 감사했죠.
그 중에서도 주지훈씨가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자극과 도움을 준 분은 누구인가요?
그야 당연히 태웅이 형이죠! 저와 함께하는 씬이 가장 많은 사람이 태웅이 형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연기고 뭐고를 다 떠나서 태웅이 형은 제가 태어나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저와는 나이 차이도 적지 않고 사실 저에게는 엄청난 선배님인데 너무 잘 해주시고 제가 하는 얘기를 다 귀담아 들어주세요. 모든 면에서 다 감사하죠.
승하는 후반에 접어들어 자신의 복수에 대해 갈등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부분 자신의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데요. 이런 무표정함을 연기하는 것이 오히려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무척 힘들어요. 승하 캐릭터가 감정의 스펙트럼이 무척 좁아서 자칫 잘못 연기했다간 다 똑같아 보일 수가 있어서 연기하면서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감독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연기할 때마다 보시면서 디테일하게 많이 가르쳐주셨거든요.
극 중 승하는 무척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실제 주지훈씨에게는 어떤 이중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중성은 누구나 다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가까운 예를 들어 가끔 너무 화나면 뒤에서 자기 부모님이나 친구들 욕을 하는 것도 일종의 이중성이죠.
그럼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나쁘다고 느껴본 적은 언제였는지?
저는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는데(웃음), 나쁘다고 생각될 때는 마음이 안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얘기를 나누다가 이 사람은 나랑 안 맞는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잘 안 봐요. 그건 냉정한 건가?(웃음) 그리고 이건 상대적인 거지만 누군가 제게 무례하게 굴면 저도 똑같이 행동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과 함께 살아와서 어른들께 공손하고 예의가 바른 편이라, 예의 없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데 상대편에서 먼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똑같이 행동해요. 그런 것도 저의 이중적인 모습이죠.
승하와 해인의 멜로가 드러나는 장면이 적어서였는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멜로가 적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엔딩에 승하가 죽고 해인이가 홀로 남겨졌잖아요. 저는 그 부분이 너무너무 슬펐어요. 멜로씬이 더 있어서 승하가 해인이에게 감정을 보여줬으면 해인이도 승하의 마음을 느꼈을 텐데 승하가 마음에만 담고 있다가 끝까지 표현도 못한 채 떠나버리니까 그게 되~게(강조해서) 아쉽더라구요.
해인과의 멜로씬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어떤 건가요?
멜로씬은 몇 씬 안돼서 고르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웃음) 승하와 해인이의 씬 중에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성당에서 해인이가 승하의 복수를 말리던, 해인이가 뒤에서 승하를 안고 울면서 설득하던 장면인데요. 말씀 드렸듯이 저는 감정이 진한 연기를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 씬이 더 기억에 남아요. 특히나 신민아씨가 슬픈 감정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제가 감정 몰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감정이 진한 연기를 말씀하시니 잡채씬이 생각나는데요.
그 씬이 처음으로 승하가 아닌 태성이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장면인데요. 드라마에선 해인이 집에서 밥을 먹다가 집 밖으로 뛰어 나와 우는 장면으로 이어지지만 실제 촬영은 따로 한 거라 다시 감정을 잡는 게 꽤 힘들었어요. 해인이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극 중 회상씬에 나온 태성이가 가족과 행복했던 한 때를 최대한 생각하면서 감정을 잡았는데 이 때 역시 민아씨의 도움이 컸죠. 뭐랄까… 민아씨의 얼굴을 보면 더 울컥해지는 게 슬픔이 복받친다고나 할까요. 그 씬을 먼저 찍고 며칠 후 밖에 나와서 우는 장면을 찍는데 감정 연결이 어려워서였는지 처음에는 눈물이 나오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하지만 몇 번의 촬영 끝에 다행히도 눈물이 나와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죠.
공교롭게도 승하가 해인이와 함께 먹었던 음식들은 모두 비벼먹는 것들이었습니다만…(웃음)
하하, 그런가요? 양푼비빔밥, 잡채, 팥빙수 그러고 보니 말씀대로 다 비벼야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군요. 하지만 모두 가장 흔하게 먹을 수 있는 보편적인 한국 음식들이라고 생각해요. 잡채는 한국에서는 특별한 날 먹는 음식이기도 한데 비싼 고급 재료가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손이 많이 가서 보통 명절이나 생일 같은 의미 있는 날이나 손님들이 오실 때 대접하는 음식이에요. 감독님께서는 제가 먹는 모습이 별로 맘에 들지 않으셨는지 꽤나 야단을 많이 맞아서 저는 먹는 장면 찍는 게 정말 두려웠어요.(웃음)
이제 엔딩에 대한 얘기를 해보죠. 승하가 오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용구에게 칼에 찔립니다. 이 때 승하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냥 멍했어요. ‘이게 뭐지? 어? 어?’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는… 원래 승하가 계획했던 복수의 끝은 오수에게 마지막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승하 마음 속에서 태성이로서의 인간적인 감정과 오수에 대한 연민, 그리고 해인이와의 관계로 인해 심한 갈등이 생기지만, 결국은 원래 계획대로 복수의 끝을 맺고자 결심을 하고 오수를 만나기 위해 나서다가 칼을 맞은 거죠. 그러면서 죽음에 임박하게 된 승하가 오수를 용서하고 회개하는 엔딩이 되는 거죠.
엔딩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결말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은 어떠신가요?
모든 관계가 그 결말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에 전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어요. 제대로 마무리 지어졌다는 느낌? 저도 엔딩에 대해선 여러 생각을 해봤지만 승하가 죽는 엔딩이 가장 마음에 확 와닿더라구요. 승하만 죽는 걸로 생각했지 오수까지 죽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생각해보면 살아남은 오수는 또 얼마나 괴롭겠어요. 너무 슬프긴 하지만 모두를 위해 좋은 결말이었다고 생각해요.
극 중이긴 하지만 죽음은 처음 경험한 것인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솔직히 저는 편했어요. 승하 캐릭터 때문에 항상 슬프고 무언가가 자꾸 옥죄어 오는 느낌 속에 지내다가 거기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해방감, 그리고 마침 엔딩씬이 실제로도 제 마지막 촬영이라 모든 게 끝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편안함이 컸어요.
그럼 마지막 촬영과 동시에 승하를 놓으실 수 있던가요?
그렇게 쉽게 안 놓아지죠. 한동안은 잘 모르고 지냈는데 이번에 한국에서 팬클럽 창단식을 하면서 제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승하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번 팬미팅에선 유난히 제가 기분이 들떠서 농담도 많이 하고 쑥스러움도 덜 타고 그랬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 제가 찍고 있는 영화 캐릭터가 그런 성격이에요. <마왕> 직후 팬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 승하의 어두움이 깔려있어서 그랬는지 데면데면하고 그랬었거든요.
그럼 평소에는 그다지 후유증을 느끼진 않았다는 건가요?
이것도 제 이중성의 일부인데(웃음), 저는 혼자 있는 걸 무척 좋아해요.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며칠이고 집 밖에 나가질 않아요. 그런데 막상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하면 제가 판 벌리고 제가 나서서 리드하며 노는 타입이에요.(웃음) 그런 시간 말고는 대부분 집에서 혼자 보내다 보니 누구랑 말을 할 일도 없어서 특별하게 후유증이나 슬픔에 대해 제가 각성할 정도로 느끼질 못했던 거 같아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저도 모르게 서서히 슬픔에 젖어 들지만 그 과정에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비로소 다 젖어버렸음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죠.
엔딩씬은 오래 찍기도 하셨고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일단 너무 추웠어요!(웃음) 그리고 그 긴 촬영 시간 동안 감정을 유지해야 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승하의 감정과 감독님께서 생각하신 승하의 감정이 서로 달랐어요. 저는 좀 더 안으로 빠져드는 감정이었다면 감독님께서는 그걸 밖으로 표출해서 보여주길 원하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감정이 그만 툭 끊겨버린 거예요. 결국 다시 감정을 잡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고, 이건 비밀이었는데 엔딩씬 다 찍고 나서는 토하고 그랬어요.
김작가님께서 승하를 살리는 대본도 쓰셨다고 하셨는데, 만약 승하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건 승하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웃음)
승하가 감정이라곤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악마 같은 인물이라면 모를까 본성은 너무 착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약 살아남았더라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서 자주 접하다 보니까 살인이나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는데, 만약 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해도 너무 잔인한데 승하는 그것도 사람을 여러 명이나 죽였단 말이에요. 과연 버틸 수 있을까요? 전 그럴 수 없다고 봐요.
펌) DC주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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